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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 날아가기 위해 독일 뮌헨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공항 게이트 옆 항공사 부스에서 새로 탑승권을 받기 위한 수속을 끝냈을 때, 독일인 직원이 물었다. “독일 관광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독일에 오시고 싶으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뇌가 제대로 작동하기도 전에 성급한 내 입이 불쑥 내뱉었다. “맥주요.” 직원이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요, 맥주. 다른 게 뭐 있겠어요.” 괜히 미안해져서 덧붙였다. “옥토버페스트에 가서 맥주를 꼭 한 번 마시고 싶거든요.”
만일 그 직원이 그리스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면,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올해의 다른 관광객들처럼, 나의 뇌와 입은 정확히 조응하며 동시에 답했을 것이다. “영화 ‘맘마 미아’요!”
장대한 그리스 신화(神話) 때문에 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때문에 방문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에게해 섬들의 환상적인 풍광을 막연히 동경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맘마 미아’가 이유였다. 세상에는 보고 나면 무작정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장대한 그리스 신화(神話) 때문에 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때문에 방문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에게해 섬들의 환상적인 풍광을 막연히 동경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맘마 미아’가 이유였다. 세상에는 보고 나면 무작정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1. 스키아토스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해서 다시 30인승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고 스키아토스 섬으로 향했다. 아테네의 북동쪽 스포라데스 제도의 중심을 이루는 이 섬은 여름엔 북유럽 사람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이지만 비수기인 11월엔 한 주에 비행 편이 두 번 밖에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스키아토스 섬 역시 ‘맘마 미아’의 촬영지였지만, 일단 거기서 또다시 배를 갈아 타고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스코펠로스 섬까지 먼저 가기로 했다.
스코펠로스 섬으로 가는 배 시간이 1시간30분 가량 남아 있어서 부둣가의 분위기 좋은 야외 카페 한 곳에 들렀다.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작은 배 모양의 소담스런 그릇에 쿠키 두 개와 함께 내왔다. 서울을 떠나 스키아토스 섬에 도착할 때까지, 짐을 분실하는 일을 비롯해 예기치 않은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30여 시간 동안 내내 몸과 마음이 조급했는데, 이제 마지막 배 표까지 사고나니 더 이상 바쁠 게 없었다.
하얀 소파에 앉아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크림이 먼저 입술을 적신 후 씁쓸한 커피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카페 바로 앞 바다에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았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였다. 카페 옆 공터에는 운행을 멈춘 작은 회전목마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열살 남짓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갔다. 테이블 사이로 고양이가 서성거렸다. 아주 가끔씩 바람이 불었다. 그게 전부였다. 서두르는 사람은 시계를 볼지언정 시간의 흐름은 목격하지 못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나는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스코펠로스 섬으로 가는 배 시간이 1시간30분 가량 남아 있어서 부둣가의 분위기 좋은 야외 카페 한 곳에 들렀다.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작은 배 모양의 소담스런 그릇에 쿠키 두 개와 함께 내왔다. 서울을 떠나 스키아토스 섬에 도착할 때까지, 짐을 분실하는 일을 비롯해 예기치 않은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30여 시간 동안 내내 몸과 마음이 조급했는데, 이제 마지막 배 표까지 사고나니 더 이상 바쁠 게 없었다.
하얀 소파에 앉아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크림이 먼저 입술을 적신 후 씁쓸한 커피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카페 바로 앞 바다에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았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였다. 카페 옆 공터에는 운행을 멈춘 작은 회전목마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열살 남짓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갔다. 테이블 사이로 고양이가 서성거렸다. 아주 가끔씩 바람이 불었다. 그게 전부였다. 서두르는 사람은 시계를 볼지언정 시간의 흐름은 목격하지 못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나는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2. 스코펠로스

스코펠로스는 스키아토스보다 면적은 더 넓었지만, 채 5000명이 안 되는 인구에 성수기에도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섬이었다. 11월이라 문을 연 호텔이 거의 없어 숙소를 찾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맘마 미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촬영된 이 섬(극중에서 ‘칼로카이리’라는 가상의 명칭을 지닌 섬 장면 대부분을 이곳에서 찍었다)은 지난 여름과 가을, ‘맘마 미아’ 특수를 톡톡히 누린 듯 했다. ‘맘마 미아’ 때문에 왔다고 말하면, 주민들은 지금 3만2763번째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저 시큰둥했다.
하지만 영화 ‘맘마 미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촬영된 이 섬(극중에서 ‘칼로카이리’라는 가상의 명칭을 지닌 섬 장면 대부분을 이곳에서 찍었다)은 지난 여름과 가을, ‘맘마 미아’ 특수를 톡톡히 누린 듯 했다. ‘맘마 미아’ 때문에 왔다고 말하면, 주민들은 지금 3만2763번째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저 시큰둥했다.

곳곳의 자판기에는 섬 유일의 영화관인 오르페우스 극장에서 매일 밤 9시30분에 ‘맘마 미아’를 상영한다는 지난 계절의 광고 포스터가 ‘스코펠로스, 맘마 미아의 섬’이라는 문구와 함께 아직껏 붙어 있었다.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나무와 돌까지 춤을 췄다는 그리스 신화 속 최고 예술가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딴 극장이라니. 그리스다운 작명법이었다. 몸을 들썩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영화인 ‘맘마 미아’ 상영관다운 명칭이기도 했다. (나중에 어렵사리 그 극장을 찾아갔지만 휴관 중이었다.)

극장뿐만이 아니었다. 그 조용한 섬에서도 신화는 그리스인들의 생활 깊숙이 박혀 있었다. 내가 묵은 호텔은 ‘아도니스’였고, 저녁을 먹었던 식당은 ‘암브로시아’였다. 그리고 텅 빈 밤 바닷가의 아무도 없는 바에서 홀짝거린 그리스 맥주 이름은 ‘미토스’(Mythos-신화)였다. ‘맘마 미아’의 초반부에서 어선에 올라타게 된 로지(줄리 월터스)가 한 어민으로부터 받아들고서 이빨로 뚜껑을 딴 채 거침없이 마셨던 바로 그 맥주였다. 스코펠로스에서의 첫 밤, 나는 ‘신화’를 마시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렵게 수소문해서 간신히 차를 빌렸다. 첫번째 행선지는 카스타니 해변.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스카이(도미닉 쿠퍼)가 ‘Lay all your love on me’를 부르며 사랑을 속삭였던 해변 장면과 타냐(크리스틴 바란스키)가 자신을 유혹하던 한참 어린 젊은 남자를 ‘Does your mother know’를 부르면서 호기롭게 물리치던 장면을 찍은 곳이었다. 샘(피어스 브로스넌) 빌(스텔란 스카스가드) 해리(콜린 퍼스)가 섬에 도착하는 장면과 소피가 친구들을 마중하는 장면, 그리고 소피와 스카이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타고 멀어지던 장면도 모두 이곳에서 찍었다.


카스타니 해변에 도달하기 위해선 차를 세우고 언덕 길을 걸어가야 했다. 가까운 곳에 에게해가 내려다 보였지만 콧속 깊숙이 파고 드는 것은 바다내음이 아니라 솔향이었다. 그리스 섬들 중 가장 울창한 숲을 지녔다는 스코펠로스의 전역을 뒤덮고 있는 소나무들이 일제히 냄새를 통해 소리라도 내지르는 듯 했다.
사실 카스타니는 스코펠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다른 해변들도 돌아보니, 파노르모스 비치나 밀리아 비치 같은 곳이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 아마도 제작진은 해송과 해안 바위로 둘러싸인 그 곳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상대적으로 촬영을 위한 통제가 쉬워서 선택했을 것이다.
사실 카스타니는 스코펠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다른 해변들도 돌아보니, 파노르모스 비치나 밀리아 비치 같은 곳이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 아마도 제작진은 해송과 해안 바위로 둘러싸인 그 곳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상대적으로 촬영을 위한 통제가 쉬워서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나무 숲 사이로 감춰진 카스타니 해변은 더없이 깔끔하고 아담했다. 영화에서는 잔교와 바(Bar)까지 있었지만, 촬영을 위해 임시로 만든 것들이었다. 인적이 거의 없는 카스타니는 굵은 모래와 작은 자갈들이 깔린 해변이었다. 찰랑이며 흔들리는 바다에 시나브로 적셔진 해변은 흡사 올리브 기름이라도 칠해놓은 듯 강렬한 태양 아래 매끄럽게 빛났다.
해변 바위 틈에 피어 있던 마르가리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스의 연인들은 상대의 사랑을 가늠해보기 위해 이 꽃잎을 차례로 따내면서 은밀히 테스트한다는 말을 전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를 사랑해’와 ‘나를 사랑하지 않아’를 번갈아 되뇌이면서 하나씩 따다가 마지막 꽃잎이 둘 중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운명을 추측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내가 그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를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맘마 미아’의 여진이 사라진 먼먼 훗날, 내가 다시 스코펠로스를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 영화도 소설도 아닌 여정 그 자체가 다시금 여정을 불러들여 오래 전 추억을 잇는 일이 생길까. 사랑의 운명 대신 여행의 운명을 엿보기 위해 꽃잎을 하나씩 따기 시작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설혹 그게 신비로운 꽃의 예지력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미래의 입구와 출구만큼은 내다보고 싶지 않았다.
해변 바위 틈에 피어 있던 마르가리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스의 연인들은 상대의 사랑을 가늠해보기 위해 이 꽃잎을 차례로 따내면서 은밀히 테스트한다는 말을 전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를 사랑해’와 ‘나를 사랑하지 않아’를 번갈아 되뇌이면서 하나씩 따다가 마지막 꽃잎이 둘 중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운명을 추측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내가 그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를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맘마 미아’의 여진이 사라진 먼먼 훗날, 내가 다시 스코펠로스를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 영화도 소설도 아닌 여정 그 자체가 다시금 여정을 불러들여 오래 전 추억을 잇는 일이 생길까. 사랑의 운명 대신 여행의 운명을 엿보기 위해 꽃잎을 하나씩 따기 시작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설혹 그게 신비로운 꽃의 예지력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미래의 입구와 출구만큼은 내다보고 싶지 않았다.

소피가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세 남자와 함께 음식을 먹고 샴페인을 마시며 그들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장면을 찍은 아그논다스에 들른 뒤, 아기오스 요아니스 성당으로 향했다. 도나(메릴 스트립)가 샘 앞에서 아픈 마음을 토로하며 애절하게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른 뒤에 깎아지른 절벽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던 곳, 그리고 소피의 결혼식이 열렸던 곳으로 등장한 그 장소는 ‘맘마 미아’의 촬영지들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1시간 가까이 울창한 산길을 달린 끝에 섬의 북쪽 해안 도로에 이르자 저 멀리 아기오스 요아니스 예배당이 보였다. 워낙 독특한 지형 위에 세운 예배당이라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도착해서 올려다보니 예배당이 세워져 있는 100여 미터 높이의 해안 바위산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까마득했다. 처음에 완만했던 계단은 점점 더 경사가 가팔라졌다.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쉬다가 배낭에서 아이팟을 꺼내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The winner takes it all’을 듣고 또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계단은 모두 105개였다.

연인들을 변하게 만드는 것은 멀어지는 사랑의 권태일까, 다가오는 사랑의 열정일까. 이제 막 닻을 올린 남의 사랑 앞에서 오랜 세월 항해해온 나의 사랑이 일순간에 침몰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던 사람의 슬픔과 자기연민을 강력한 멜로디에 실어낸 그 노래는 아바 음악의 정수였고, 영화 ‘맘마 미아’의 정점이었으며, 이번 여행의 정곡이었다.
노래를 마친 후 울음을 삼키며 계단을 오른 도나가 잠시 돌아봤던 하얀 문을 지나 정상에 놓인 예배당 앞에 서니 정각 12시. 성스럽고 준엄한 태양빛이 어깨 위에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둘레에 쳐진 낮은 담장 밑으로 까마득한 절벽과 짙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아무도 없는 아기오스 요아니스는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 한 번 없었고,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임에도 파도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흡사 ‘세상의 바깥’에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지을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을 도와서 계단을 만들고 건물을 세운 사람들은 또 누구였을까. 이곳을 마음에 둔 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神)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니까, 그들을 추동한 것은 성(聖)의 인력(引力)이었을까, 속(俗)의 척력(斥力)이었을까.
노래를 마친 후 울음을 삼키며 계단을 오른 도나가 잠시 돌아봤던 하얀 문을 지나 정상에 놓인 예배당 앞에 서니 정각 12시. 성스럽고 준엄한 태양빛이 어깨 위에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둘레에 쳐진 낮은 담장 밑으로 까마득한 절벽과 짙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아무도 없는 아기오스 요아니스는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 한 번 없었고,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임에도 파도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흡사 ‘세상의 바깥’에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지을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을 도와서 계단을 만들고 건물을 세운 사람들은 또 누구였을까. 이곳을 마음에 둔 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神)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니까, 그들을 추동한 것은 성(聖)의 인력(引力)이었을까, 속(俗)의 척력(斥力)이었을까.

예배당 건물의 현관에는 열쇠가 꽂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실내는 영화에 등장한 결혼식장 넓이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예배당에서 이뤄진 것으로 되어 있는 영화 속 결혼식 장면은 따로 지은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갖가지 성화로 장식된 제단 옆에는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일백다섯개의 계단을 오른 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각국 언어로 적혀 있었다. 한글은 없었다. 펜을 들고 ‘평화로운 마음,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적어 넣었다.
예배당을 나와서 마당에 떨어져 있는 올리브 열매를 줍다가 청동으로 만든 종이 올리브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에는 매듭마다 파랗고 빨갛게 칠한 흰 줄이 매달려 있었다. 줄을 잡고 종을 쳤다. 맑은 종소리가 파랗게 빨갛게, 저 멀리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파도 같고 햇살 같고 바람 같은 종소리였다.
예배당을 나와서 마당에 떨어져 있는 올리브 열매를 줍다가 청동으로 만든 종이 올리브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에는 매듭마다 파랗고 빨갛게 칠한 흰 줄이 매달려 있었다. 줄을 잡고 종을 쳤다. 맑은 종소리가 파랗게 빨갛게, 저 멀리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파도 같고 햇살 같고 바람 같은 종소리였다.

종소리가 만들어내는 동심원을 상상하며 멀리 내다보고 있자니 아기오스 요아니스에 오기 위해 차를 타고 달려왔던 구불구불한 산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수십년간 내가 걸어온 삶이 그대로 시각화되는 느낌이었다. 하루 사이에 되살아나 아우성치는 과거의 기억들을 억누른 채 지금 이곳에서 딸 소피의 결혼식을 치러야 했던 도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스키아토스의 해안 마을. ⓒ 이동진닷컴-이동진

스키아토스의 호젓한 골목길. ⓒ 이동진닷컴-이동진

스키아토스의 쇼핑가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즐기는 젊은이들. ⓒ 이동진닷컴-이동진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에서 내려다 본 스키아토스 타운. ⓒ 이동진닷컴-이동진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의 종탑. ⓒ 이동진닷컴-이동진

좁은 길을 걷다 부딪쳐 깨진 내 시계는 12시 50분에서 멈췄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소피가 편지를 부치던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의 뜰을 고양이가 걷고 있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스키아토스의 구항. ⓒ 이동진닷컴-이동진

밤에 다시 찾은 스키아토스의 구항은 좀더 운치가 있었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잔교가 인상적인 차네리아 비치. ⓒ 이동진닷컴-이동진

인근 산 위에서 내려다본 다무하리. ⓒ 이동진닷컴-이동진

다무하리에서 만난 할머니는 더없이 온화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다무하리의 바닷가. ⓒ 이동진닷컴-이동진
3. 다시 스키아토스로

스키아토스 섬의 아침은 더없이 상큼했다. 사실 곧 겨울이 다가와야 할 11월의 그리스는 분명 비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기간 내내 따뜻하고 맑아서 대부분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한국의 9월 초 같은 온도에 구름도 거의 없는 화창한 날이 연속되는 것에 감탄했더니, 현지 주민들은 내가 운이 좋은 여행자라고 했다. 그리고 예년보다 훨씬 높은 온도는 이상 기후에 가까울 정도라는 설명이었다.
여행에서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한다고 해도, 날씨만큼은 순전히 운이다. 그리고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으로 그 여행의 색깔을 지배한다. 여행만 그럴 리는 없다. 우연의 가공할만한 힘은 종종 가장 강력한 의지의 예봉조차 가볍게 꺾어버린다. 그건 많은 경우 우리를 낙담케 하지만, 때론 기이한 희망이 되기도 한다.
여행에서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한다고 해도, 날씨만큼은 순전히 운이다. 그리고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으로 그 여행의 색깔을 지배한다. 여행만 그럴 리는 없다. 우연의 가공할만한 힘은 종종 가장 강력한 의지의 예봉조차 가볍게 꺾어버린다. 그건 많은 경우 우리를 낙담케 하지만, 때론 기이한 희망이 되기도 한다.

유로화 환율이 급격하게 치솟아 여행 경비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어느 정도는 비수기의 저렴한 요금이 상쇄해주기도 했다. 여름 휴양지인 스키아토스 섬에서 내가 머물렀던 호텔의 경우, 성수기 때 요금의 3분의 1 정도에 숙박이 가능했고, 심지어 거기서 좀더 깎을 수도 있었다.

대신 어디를 가든 거의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각지에서 날아온 관광객들로 붐비기 십상인 관광대국 그리스에서 호젓하고 한가롭게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아주 가끔은 북적대는 열기가 그립기도 했다. 대부분 문을 닫아 건 숙박업소와 식당 그리고 상점들 사이에서 헤매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올 여름 국제적으로 크게 히트한 영화 ‘맘마 미아’를 찾아나선 동료 여행자 역시 만날 수 없었다. 다 가질 수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무엇을 좀더 원하느냐에 대한 마음의 비중과 확률 문제였다.

전날 저녁 스코펠로스에서 다시 스키아토스까지 배로 온 후, 다음날 아침에 섬의 중심지 마을인 스키아토스 타운의 언덕 길을 걸어 올라갔다.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 길을 한참 올라서 도착한 곳은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 ‘맘마 미아’의 도입부에서 섬을 떠나 배를 타고 본토에 도착한 소피가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 남자에게 편지 세 통을 부치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계단 길이 끊어진 곳에 세워진 성당 바로 옆, 가정집 마당에 그냥 테이블 몇 개 가져다 놓은 듯한 허름한 찻집의 이름은 ‘파이널 스텝 카페’였다. 스코펠로스의 아기오스 요아니스든, 스키아토스의 아기오스 니콜라스든, 혹은 암벽 산 위의 수도원들로 유명한 메테오라든, 그리스의 많은 성소들은 계단이나 길이 끊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기도는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일까.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의 마당에 서면 스키아토스 타운과 그 앞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전망은 영화에서 본 그대로였지만, 소피가 편지를 넣었던 (촬영을 위해서 만들어놓았던) 노란 우체통은 물론 없었다. 정처 없이 이국의 공간을 헤매다가도 탁 트인 시야로 세상을 굽어볼 수 있는 장소에 서면, 불현듯 어딘가로 사연을 날려보내고 싶어진다. 이 영화의 제작진들이 굳이 높은 이곳까지 수소문해 찾아와 노란 우체통을 만들고 촬영을 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계단 길이 끊어진 곳에 세워진 성당 바로 옆, 가정집 마당에 그냥 테이블 몇 개 가져다 놓은 듯한 허름한 찻집의 이름은 ‘파이널 스텝 카페’였다. 스코펠로스의 아기오스 요아니스든, 스키아토스의 아기오스 니콜라스든, 혹은 암벽 산 위의 수도원들로 유명한 메테오라든, 그리스의 많은 성소들은 계단이나 길이 끊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기도는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일까.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의 마당에 서면 스키아토스 타운과 그 앞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전망은 영화에서 본 그대로였지만, 소피가 편지를 넣었던 (촬영을 위해서 만들어놓았던) 노란 우체통은 물론 없었다. 정처 없이 이국의 공간을 헤매다가도 탁 트인 시야로 세상을 굽어볼 수 있는 장소에 서면, 불현듯 어딘가로 사연을 날려보내고 싶어진다. 이 영화의 제작진들이 굳이 높은 이곳까지 수소문해 찾아와 노란 우체통을 만들고 촬영을 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나 문을 열어두고 있었던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의 내부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둥글고 붉은 지붕을 가진 하얀 종탑이었다. 종탑의 사면엔 네 개의 시계가 붙어 있었다. 그 중 세 개의 시계는 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하나는 망가져 10시10분에 멈춰져 있었다. 시계 바늘은 까딱거리며 움직이려 했지만 뭔가에 걸렸는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계속 움찔거리며 제자리 걸음만 했다.
가방 앞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전날 스코펠로스의 좁은 길을 걷다가 팔을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유리가 산산이 깨졌던 내 손목시계를 꺼내보았다. 그 시계의 바늘 역시 충격으로 12시50분에서 멈춰 있었다.
가방 앞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전날 스코펠로스의 좁은 길을 걷다가 팔을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유리가 산산이 깨졌던 내 손목시계를 꺼내보았다. 그 시계의 바늘 역시 충격으로 12시50분에서 멈춰 있었다.

균질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기억되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가거나 그와 정반대로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시간, 혹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시간만이 기억된다. 이를테면, 소피를 가질 무렵의 수십년 전 여름날들은 도나에게 있어서 종탑의 10시10분이나 내 손목시계의 12시50분 같은 시간일 것이다.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여름날의 남자들이 갑작스레 다시 나타났어도, 도나가 그 시절의 감정을 생생히 되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마음 속의 어떤 시계 바늘이 그 순간 이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당 앞 마당을 거닐 때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아침 식사를 못했던지, 고양이는 계속 슬픈 소리를 내며 낯선 나그네로부터 먹을 것을 얻길 원했다. 가방을 열 때마다 음식을 꺼내는 줄 알고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비스켓이나 초컬릿 조각 하나 없었기에 그때마다 안쓰러워졌다.
10여 년 전 그리스에 처음 오기 전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스페체스 섬의 고양이들에 대해 서술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키만의 감수성 짙은 관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리스의 섬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고양이에 대한 느낌과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산토리니에서 카스텔로리조와 스키아토스까지, 그리스의 섬들은 예외 없이 고양이들의 천국이니까. 대문 앞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 식당 테이블 주위를 서성이는 고양이, 수풀에서 걸어나오는 고양이... 그리스의 고양이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텅 빈 골목 길을 거닐다가 그들의 낮잠을 깨울 때면, 고양이들의 마을에 불청객으로 들어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지기도 했다.
10여 년 전 그리스에 처음 오기 전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스페체스 섬의 고양이들에 대해 서술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키만의 감수성 짙은 관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리스의 섬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고양이에 대한 느낌과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산토리니에서 카스텔로리조와 스키아토스까지, 그리스의 섬들은 예외 없이 고양이들의 천국이니까. 대문 앞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 식당 테이블 주위를 서성이는 고양이, 수풀에서 걸어나오는 고양이... 그리스의 고양이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텅 빈 골목 길을 거닐다가 그들의 낮잠을 깨울 때면, 고양이들의 마을에 불청객으로 들어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지기도 했다.

스키아토스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다. 크고 작은 여객선을 비롯해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신항(新港)이지만, 영화 ‘맘마 미아’에 등장한 것은 구항(舊港)이었다. 바로 샘과 해리가 택시에서 내려 내달렸지만 결국 배를 놓치고 마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로지와 타냐가 어민들로 가득한 작은 어선을 타고 가는 장면을 찍은 곳도 여기다.
작은 어선들만이 이용하는 구항은 시설이 낙후되고 규모도 적었지만, 기능만을 살린 신항에 비해 훨씬 더 아름다웠다. 부두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대포와 거대한 닻이 놓여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전몰 장병 기념비 위로 그리스 국기가 힘차게 나부꼈다. 부두에 서서 마을 쪽을 바라보니 하얀 벽과 주황 지붕에 파란 창문을 한 지중해 마을 특유의 풍광이 펼쳐졌다. 찬란한 햇살 때문에, 집집마다 매달린 위성 안테나가 흡사 전파가 아니라 태양열을 빨아들이기 위한 집열판처럼 보일 정도였다.
작은 어선들만이 이용하는 구항은 시설이 낙후되고 규모도 적었지만, 기능만을 살린 신항에 비해 훨씬 더 아름다웠다. 부두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대포와 거대한 닻이 놓여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전몰 장병 기념비 위로 그리스 국기가 힘차게 나부꼈다. 부두에 서서 마을 쪽을 바라보니 하얀 벽과 주황 지붕에 파란 창문을 한 지중해 마을 특유의 풍광이 펼쳐졌다. 찬란한 햇살 때문에, 집집마다 매달린 위성 안테나가 흡사 전파가 아니라 태양열을 빨아들이기 위한 집열판처럼 보일 정도였다.

항구는 다시 찾은 그날 밤에 더 운치를 풍겼다. 아이들은 저마다 낚시 도구를 들고나와 물고기를 낚았고, 어른들은 부두에 앉아서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기다란 부둣가에는 부드러운 가로등 불빛 아래로 여자들이 유모차를 끌고서 천천히 걸었다. 문을 연 몇 안 되는 식당에서는 튀긴 생선 요리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 밤의 짙은 어둠 속, 부두 끝에 서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검푸른 바다가 내 발끝 바로 아래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멀리 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야위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초승달.
이튿날 오후, 스키아토스 타운의 골목길을 누비다가 자전거를 빌렸다. 비수기였기에 대여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걸어서 중도에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다 한 대여점 주인이 뭔가를 가지고 나오려고 닫힌 문을 잠시 따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따라 들어가 부탁한 끝에 간신히 한 대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스키아토스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이었지만, 그래도 걸어서 둘러볼 수는 없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의 해변들 중 가장 멋지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쿠쿠나리스 비치에 들러보고 싶었다. 스키아토스 타운에서 쿠쿠나리스까지는 왕복 20킬로미터. 늦은 오후이긴 했지만,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면 해지기 전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산과 숲과 바다와 하늘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해안 도로는 경치가 빼어났다. 하지만 굴곡이 극심해 금방 체력을 소진시켰다. 빵으로 점심을 때운 상황에서 시원찮은 기어를 지닌 자전거로 급경사의 언덕 몇 개를 넘자 탈진할 것 같았다. 결국 절반쯤 갔을 때 쿠쿠나리스를 단념하고 자전거를 되돌렸다. ‘내가 언제 이곳에 다시 올까’ 싶었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그 밤의 짙은 어둠 속, 부두 끝에 서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검푸른 바다가 내 발끝 바로 아래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멀리 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야위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초승달.
이튿날 오후, 스키아토스 타운의 골목길을 누비다가 자전거를 빌렸다. 비수기였기에 대여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걸어서 중도에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다 한 대여점 주인이 뭔가를 가지고 나오려고 닫힌 문을 잠시 따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따라 들어가 부탁한 끝에 간신히 한 대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스키아토스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이었지만, 그래도 걸어서 둘러볼 수는 없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의 해변들 중 가장 멋지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쿠쿠나리스 비치에 들러보고 싶었다. 스키아토스 타운에서 쿠쿠나리스까지는 왕복 20킬로미터. 늦은 오후이긴 했지만,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면 해지기 전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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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근처의 차네리아 비치로 내려갔다. 스코펠로스의 해변들에 비해서 훨씬 더 가늘고 고운 모래로 뒤덮인 차네리아에 자전거를 세워두려 했지만 자꾸 넘어지기만 했다. 자전거를 그냥 모래밭에 뉘어놓은 후 소박한 잔교로 걸어갔다. ‘맘마 미아’에 등장하는 해변과 부두는 잔교들이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막상 방문해보니 그것은 모두 촬영용 설치물들이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잔교는 오히려 차네리아처럼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곳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되었다.
해변에서 어린 아들과 햇볕을 즐기고 있던 여자는 내가 잔교 위를 서성이자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들과 나만 있는 해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내 존재 자체가 남에게 위협이 되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여자에게 다가가 카메라를 건네고 기념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굳이 내가 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찍어주다가 여자의 마음이 풀렸다. 아이가 너무 귀엽다고 했더니, 그럼 같이 찍으라면서 함께 한 사진까지 찍어줬다. 그 아이의 이름이 테오라는 것도 알았다. 그 사진 속에서 아이를 미소짓게 하고 싶었던 여자가 거듭 이름을 불러대며 웃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차네리아를 먼저 떠난 것은 나였다. 그곳을 벗어나 해변이 굽어 보이는 언덕에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테오의 엄마는 다시금 짐을 풀고서 테오와 놀아주고 있었다. 전경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들이댈 때, 멀리서 나를 알아본 테오의 엄마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사진 찍는 것보다 마주 보며 나도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해변에서 어린 아들과 햇볕을 즐기고 있던 여자는 내가 잔교 위를 서성이자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들과 나만 있는 해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내 존재 자체가 남에게 위협이 되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여자에게 다가가 카메라를 건네고 기념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굳이 내가 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찍어주다가 여자의 마음이 풀렸다. 아이가 너무 귀엽다고 했더니, 그럼 같이 찍으라면서 함께 한 사진까지 찍어줬다. 그 아이의 이름이 테오라는 것도 알았다. 그 사진 속에서 아이를 미소짓게 하고 싶었던 여자가 거듭 이름을 불러대며 웃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차네리아를 먼저 떠난 것은 나였다. 그곳을 벗어나 해변이 굽어 보이는 언덕에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테오의 엄마는 다시금 짐을 풀고서 테오와 놀아주고 있었다. 전경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들이댈 때, 멀리서 나를 알아본 테오의 엄마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사진 찍는 것보다 마주 보며 나도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4. 다무하리

‘맘마 미아’의 촬영지들은 대략 두 군데로 나뉜다. 극중 ‘칼로카이리’라는 가상의 이름을 지닌 섬의 장면들은 스코펠로스 섬에서 찍었고, 그리스 본토 장면들은 스키아토스 섬에서 찍었다.
하지만 두 섬을 제외한 주요 촬영지가 한 군데 더 있었다. 그것은 스코펠로스와 스키아토스를 향해 돌출한 그리스 본토의 펠리온 반도 동해안에 있는, 다무하리라는 작은 마을이다. 촬영팀이 ‘도나의 해변’이라고 불렀다는 이 마을의 해안에서는 ‘맘마 미아’에서 가장 짜릿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Dancing queen’ 시퀀스의 뒷부분을 찍었다. 온 마을 여자들이 몰려나와 잔교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다가 급기야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던 바로 그곳. 도나가 칼로카이리에 도착한 로지와 타냐를 맞는 장면도 여기서 촬영되었다.
스키아토스와 스코펠로스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다무하리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우선 스키아토스에서 배를 타고 펠리온 반도의 중심 도시인 볼로스까지 3시간 가까이 가야 했고, 버스나 기차 편이 따로 없기에 볼로스에서 다시 차를 대절해 7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게다가 펠리온 반도 서해안의 볼로스에서 동해안의 다무하리까지 가려면 꼬불꼬불 험준한 산길과 아찔한 해안 절벽 길을 내내 달려야 했다. 그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멀미까지 했다. 아무리 ‘맘마 미아’에 매혹된 팬이라도 웬만해선 다무하리까지 가진 못할 듯 싶었다.
다무하리는 채 백 호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전부 노인들이었다.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는 듯, 어디를 가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대문 앞에 나와 있던 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기에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그리스에서 가장 선한 미소를 머금어서 화답했다.
하지만 두 섬을 제외한 주요 촬영지가 한 군데 더 있었다. 그것은 스코펠로스와 스키아토스를 향해 돌출한 그리스 본토의 펠리온 반도 동해안에 있는, 다무하리라는 작은 마을이다. 촬영팀이 ‘도나의 해변’이라고 불렀다는 이 마을의 해안에서는 ‘맘마 미아’에서 가장 짜릿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Dancing queen’ 시퀀스의 뒷부분을 찍었다. 온 마을 여자들이 몰려나와 잔교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다가 급기야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던 바로 그곳. 도나가 칼로카이리에 도착한 로지와 타냐를 맞는 장면도 여기서 촬영되었다.
스키아토스와 스코펠로스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다무하리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우선 스키아토스에서 배를 타고 펠리온 반도의 중심 도시인 볼로스까지 3시간 가까이 가야 했고, 버스나 기차 편이 따로 없기에 볼로스에서 다시 차를 대절해 7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게다가 펠리온 반도 서해안의 볼로스에서 동해안의 다무하리까지 가려면 꼬불꼬불 험준한 산길과 아찔한 해안 절벽 길을 내내 달려야 했다. 그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멀미까지 했다. 아무리 ‘맘마 미아’에 매혹된 팬이라도 웬만해선 다무하리까지 가진 못할 듯 싶었다.
다무하리는 채 백 호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전부 노인들이었다.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는 듯, 어디를 가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대문 앞에 나와 있던 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기에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그리스에서 가장 선한 미소를 머금어서 화답했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가게를 찾을 수 없었기에 할머니께 문을 연 곳이 있는지 물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시는 할머니는 웃으며 팔만 내저으셨다. 물을 마시는 시늉과 함께 지폐를 내보이며 간단히 ‘워터(water)’라는 단어만 반복했더니 그제서야 알아들으시고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리곤 따라오라는 눈짓으로 앞장서서 가신다. 골목 귀퉁이에 있던 작은 상점의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간 할머니를 따라 들어서자, 선반의 절반 가까이가 비어 있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물과 콜라 그리고 과자 두어 개를 샀더니 할머니가 우편 엽서 두 장을 선물로 끼워주셨다. 그리곤 그리스어로 뭔가를 자꾸 물어보셨다. 눈치를 보니 내가 그 마을에 나타난 이유를 궁금해하시는 듯 했기에 ‘맘마 미아’에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맘마 미아’란 말을 알아들으신 할머니는 손뼉을 한번 치면서 크고 환하게 웃으셨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한국인과 그리스인은 스웨덴 그룹과 영국 감독과 미국 배우의 활약에 힘입어 이탈리아어 감탄사를 통해 대화에 성공했다. 영화란 그리고 음악이란 때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가장 확실하게 소통하는 방법일 것이다.
물과 콜라 그리고 과자 두어 개를 샀더니 할머니가 우편 엽서 두 장을 선물로 끼워주셨다. 그리곤 그리스어로 뭔가를 자꾸 물어보셨다. 눈치를 보니 내가 그 마을에 나타난 이유를 궁금해하시는 듯 했기에 ‘맘마 미아’에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맘마 미아’란 말을 알아들으신 할머니는 손뼉을 한번 치면서 크고 환하게 웃으셨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한국인과 그리스인은 스웨덴 그룹과 영국 감독과 미국 배우의 활약에 힘입어 이탈리아어 감탄사를 통해 대화에 성공했다. 영화란 그리고 음악이란 때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가장 확실하게 소통하는 방법일 것이다.

물을 마신 후 해변으로 걸어 내려갔다. 같은 그리스의 해변이라도 에게해의 섬들과 본토의 바닷가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섬들의 해변이 여성적이라면, 다무하리의 해변은 남성적이었다. 드넓은 모래 사장 대신 크고 작은 바위들이 근해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다무하리 바닷가의 특징은 그곳이 펠리온 반도 동해안의 유일한 자연항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 듯 했다. 주변의 산들과 올리브 나무 숲이 해안을 감싸고 있어서 고대에는 근처를 지나는 해적의 침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천혜의 항구였다.
해변에서 망치로 두드려가며 작은 배를 수선하고 있던 한 남자가 눈인사를 건네왔다. 바다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맘마 미아’에서 느껴지던 것보다 훨씬 더 얕고 차가웠다. 그리고 역시, 영화 속에서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잔교는 없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어디선가 생각지도 못한 낙엽들이 쏟아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주변 산들은 단풍투성이였다. 에게해의 섬들에선 거의 떠올리지 못했던 가을이 다무하리 깊숙이 도착해 있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맘마 미아!

해변에서 망치로 두드려가며 작은 배를 수선하고 있던 한 남자가 눈인사를 건네왔다. 바다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맘마 미아’에서 느껴지던 것보다 훨씬 더 얕고 차가웠다. 그리고 역시, 영화 속에서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잔교는 없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어디선가 생각지도 못한 낙엽들이 쏟아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주변 산들은 단풍투성이였다. 에게해의 섬들에선 거의 떠올리지 못했던 가을이 다무하리 깊숙이 도착해 있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맘마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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